ー최악.
뭐, 수도 없이 끔찍한 연애들을 겪어 와 봤지만, 가히 지금을 뛰어넘을 순 없으리라. 그런 생각이 앙굴리말라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그는… 그러니까 지금의 애인은, 말 그대로 정말 최악이었다. 그저 흔하지 않은 흡혈귀가 연인인 것을 남들에게 자랑하고 싶은 사람. 아니, 연인이라고 불러주는 건 잘 봐줘서 그렇게 말하는 거고. 자신의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흡혈귀가 있단 걸 재밌다고 여기며, 그게 자신의 자랑거리라도 되듯이 구는 여자였다. 그것도 멀숙히 생긴, 이 지역에서 보기 힘든 외국에서 온 흡혈귀라면 더더욱. 자신을 트로피처럼 생각하고, 마치 데리고 다니는 애완동물처럼 자랑하고 다니는 사람.
그의 애인이라는 말로 포장될 뿐이지, 잡고 있는 손은 목에 걸린 목줄이었고, 그의 애정 표현은 발목을 묶는 족쇄였다.
왜 이런 사람을 좋아하게 된 걸까. 이젠 까마득해 기억도 나지 않는 과거를 떠올리기 위해 살짝 표정이 일그러졌는지, 자신의 옆에 서 있던 그의 입에서 과거엔 듣기만 해도 즐거웠던 맑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어머, 그레이엄. 표정이 안 좋아 보여…어디 몸이라도 안 좋아?”
“아, 아니. 오늘 조금 일찍 일어나서인지 햇볕 어지럼이 좀 있나 봐. 걱정하지 마, 엘리.”
그레이엄—앙굴리말라—는, 속으로 헛웃음을 지었다. 햇볕 어지럼이라니. 굳이 따지자면 있기야 하겠지만, 진조인 그에게 약간 정도라면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을 일이었다. 하지만 앙굴리말라의 말을 들은 여자는 자신의 애인이 몸 상태가 안 좋다고 하는 데에도 마치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듯이 다시 한번 햇볕 어지럼! 하는 말을 반복하고서는 그 자리에 앙굴리말라를 두고서 자신의 주변에 있는, 아마도 진짜 친해지고 싶으며, 가까워지고 싶은 사람들의 사이로 뛰어 들어갔다. 방금 들었나요? 그레이엄이 햇볕 어지럼이래요. 신기하기도 해라. 늘 활발히 움직이는 것만 봐 왔는데, 역시 흡혈귀는 흡혈귀인가 보네요. 그러게 말이에요.
자신들끼리 뭐가 그리 신이 나는지 자길 쳐다보고 목소리를 올리며 떠드는 사람들에게 슬쩍 눈인사를 한 뒤에야 작게 한숨을 내쉬며 앙굴리말라는 겨우겨우 탁 트인 테라스까지 가고 나서야 혼자가 될 수 있었다. 이게 대체 이번 주에만 몇 번째 사교회에 파티인지. 사람을 만나는 건 좋아하지만, 신기한 구경거리로서 남들 앞에 서는 건 질색이었다. 그야 숨이라도 한 번 내쉬면 자신에게 꽂히는 수십 개의 시선과 그 중간중간 드물게 섞여 있는 혐오의 기척이 그렇게 피곤할 수는 없었으니까. 심지어 얼마 전에는, 남들의 앞에서 강제로 성관계를 하는 모습까지 구경거리가 되어야 했던 터여서 지금은 정말로 남의 시선이 끔찍했다. 아직까지도 엘리의 강요로 엘리가 아닌, 구경꾼들과 시선을 마주하며 엘리가 하라는 대로 움직이던 그날이 눈앞에 생생했으니.
그레이엄은 엘리를 사랑한다. 피곤하고 힘들고, 그의 비위 맞추기란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지만. 심지어 그는 자신을 “연애 상대"로 사랑하는 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그레이엄은 엘리를 사랑하고 있었다. 막무가내로 졸라오는 모습이 자신의 눈엔 귀여워 보였고, 남들에게는 보여주지 않는 모습을 저에게 보여주는 그 순간순간도 너무나도 좋았다. 하지만, 하지만.…
“하...”
추운 겨울바람이 볼을 쓸고 지나가고, 입 밖으로 새어나간 숨은 차가워서 입김이 일지도 않았다. 앞으로 얼마나 자신은 엘리에게 끌려다니며 구경거리가 될까. 그리고 엘리는 언제 자신에게 흥미를 잃게 될까. 앙굴리말라는 엘리가 저택에 새로 들어온 젊은 마부에게 마음을 빼앗겼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누구보다 남을 사랑해 본 그였으므로, 남이 사랑에 빠진 모습은 잘 알아챌 수 있다고 자신하고 있었으니 아마 확실할 것이다. —뭐, 그가 지금으로부터 몇백몇십년 후에 자신을 좋아하는 누군가를 전혀 눈치채지 못하리란 건 지금의 앙굴리말라는 모르고 있었으니.— 엘리와 헤어지게 되면 멀리 떠나 다음엔 담피르로서 살아야지. 흡혈귀임을 드러내고 맺게 된 관계에 지긋지긋한 두통을 껴안았으니, 조금 더 시간을 두자. 그래, 한 40년 정도는…
“그레이엄-! 어디 있어요? 그레이엄?”
“응, 잠깐 달 기운을 받고 있었어. 다시 들어갈게.”
그렇게 앞으로의 계획을 세우며, 다시 자신의 연인이 좋아할 만한 말을 꾸며 내면서 다시 수많은 시선 속으로 몸을 던졌다. 다시는 이런 연애 같은 거, 사랑 같은 건 하지 않으리라. 수 십번은 실패한 다짐을 다시 한번 맺으면서. 정말 최악인 건 자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억지로 무시한 채로.